가느다란 오카리나 소리가 호수 위를 날았다. 경쾌한 선율에도 불구하고 그 음색은 무기력하게 호수 위를 떠다닐 뿐이었다.
아이는 문득 연주하던 손을 멈추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나뭇잎들이 작은 손끝에 스치며 옅게 사각거렸다. 그 소리에 나무에 기대어 있던 이가 고개를 돌렸다. 빼곡한 나무 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갈색 깃털이 달린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쓴, 한 테라핀 아이였다. 아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바라본 이는 아이가 그렇게나 빨리 정수의 영역을 돌보고 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의혹스러운 눈치였으나,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만 호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호수 건너편, 물안개 너머로 아스라하게 보이는 움직임들은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도 호수 저편에 무의미하게 시선을 던지다, 고개를 돌려 제 동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챠미네.."
아이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호수 너머 존재들을 향한 챠미네의 순전한 증오와 분노는, 아이에게 있어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명령과도 같았다. 아이는 우울한 표정으로 뒤돌아 걸어갔다. 그런 아이의 발걸음을, 푹 잠긴 채 갈라진 목소리가 붙잡았다.
"케이...호수가 얼마나 더 버텨줄 수 있을까.."
챠미네는 오로지 그 소리만을 몇 달동안 반복하고 있었다. 케이라 불린 아이는 신경질이 난 듯 거칠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먹먹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다른 곳으로 가자, 챠미네. 다른 정수로 가면 되잖아. 바리아도 제이드도 도와준댔어. 제발.."
케이 역시 같은 대답을 몇 달동안 이어 왔다. 그러나 챠미네는 호수에 남겠다는 고집스러운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케이는 그를 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었다.
10년 전, 케이가 태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카는 나무가 되었다. 그들은 슬퍼했지만, 곧 생성될 다른 테라핀을 기다리며 호수를 정성껏 가꾸었다. 하지만 호수에 나타난 것은 새로운 테라핀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낯선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많이 먹는 자들이었고, 호수의 물을 가차없이 끌어다 쓰며 동시에 호수를 오염시켰다.
케이와 챠미네는 알 수 없었지만, 외부 존재들은 또 다른 외부의 존재들과 다투는 중이었고, 서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기 위해 안달하는 중이었다. 서로의 우물에 독을 풀고 집을 불태우는 전쟁의 틈에서 호수가 멀쩡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챠미네는 자신이 기대어 있던 아이카의 나무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그러곤 다른 쪽 손으로 깃털을 쓰다듬듯 잎사귀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공허했고, 몇 번이나 반복되어 습관처럼 굳어진 움직임일 뿐이었다.
'외부의 존재들은 결국 자멸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이 호수가 먼저 끝장나겠지. 아이카, 너도..그리고 나도.. '
테라핀은 원래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 정수의 넓디넓은 영역 안에 살아가는 테라핀은 아주 적기 때문에, 그들은 혼자 남게 되더라도 별 무리없이 자신의 흥미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케이는 지금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챠미네는 세상과 공명할 의지를 잃은 채, 다가오는 죽음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엄습해 오는 한없는 고독감에 침잠하지 않으려 아이는 땅을 박차고 숲속으로 달려나갔다. 복잡하게 얽힌 나무뿌리와 낙엽이 발굽에 채어 부서져 갔지만 아이는 뒤돌아보지 않고 가속했다. 시원한 바람이 제 슬픔을 씻어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얼마나 달렸을까, 날카로운 두통이 찾아들자 케이는 그제서야 멈춰 섰다. 정수의 영역을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신호이자, 케이가 기대하고 있던 것. 케이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가만히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숲 전체가 붉은빛에 휩싸여 있었다. 선명한 단풍과 찬란한 노을이 숲을 장작 삼아, 높아만 가는 하늘을 향해 외치는 불꽃의 애가. 나뭇잎 사이사이로 불기둥 같은 빛들이 스며들어 깊숙한 숲속까지도 붉게 물들었다. 케이는 그 순간을 한참이나 음미했다. 죽어가는 정수가 시간에 스스로를 불살라 보여주는 마지막 선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케이는 약간 침울해졌다.
'아이카. 나는 못하겠어. 그렇게 의연하게 죽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차라리 챠미네처럼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었더라면..'
케이는 또 다시 우울감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오카리나를 꺼내들었다. 아이카가 준, 나뭇잎이 그려진 오카리나. 챠미네는 왜 케이 것을 따로 만들어 주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아이카는 나뭇잎처럼 싱그러운 초록빛의 깃털을 갸웃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당시 아이카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하루 종일 보이지 않던 아이카를 찾기 위해 숲을 돌아다니다 해 질 무렵 호수 근처에서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싱그러운, 처음 보는, 하지만 익숙한 나무를 발견했을 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오카리나는 노래를 참 잘 부르는 것 같아, 아이카. 한번 들어볼래?'
케이는 오카리나의 취구를 입에 가져다 대곤, 노을이 춤추는 박자에 맞추어 느릿하게 연주했다. 선율은 숲을 스치는 산들바람과 섞였다가, 타는 듯한 단풍잎에 미끄러졌다가, 노을빛에 타들어 스러지며 퍼져나갔다.
노을과 아이의 합동 연주는 짧았고,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자 아이는 호수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불꽃들이 서편에서 춤추고 있었다.
'..잠깐, 해는 이미 지지 않았나?'
그건 노을이 아니었다. 진짜 불길이었다.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케이는 다급하게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뜨거운 연기가 기어오고 있었지만 케이는 개의치 않고 불타는 숲을 달렸다. 제 가족을 애타게 부를 법도 했지만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분명 챠미네는 호수 근처에 있을 것이고, 여차하면 호수로 들어가 불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럴 의지가 남아있다면.
하지만 케이는 호수까지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들을 푸르게 감싸 주던 나무들이 이젠 사나운 불의 장벽이 되어 호수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케이는 어쩔 수 없이 호수 근처를 돌며 들어갈 틈을 찾기 시작했다. 너무 멀리 돌아가면 외부 존재들과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극심한 두통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고, 열과 연기 때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정수는 파괴되었다. 테라핀은 더 이상 이곳과 공명할 수 없다. 당장 빠져나가야 한다고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케이는 챠미네를 찾았다. 연기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케이는 애써 소리에 집중했다.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렸고, 케이는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외부의 존재들이라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고, 챠미네라면 데리고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대하며 케이는 간신히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케이가 기대하던 두 가지 결과 모두를 산산조각내는 장면이었다.
그것은 온 몸에 나뭇가지가 돋아나 있었고, 그중 대부분은 까맣게 불타 있었다. 팔은 수십 갈래의 날 선 가시덩굴들이 되어 있었고 하체에는 끔찍한 모습으로 뒤틀려 꿈틀거리는 나무뿌리들이 부속지처럼 나 있었다. 다만 그것의 머리에서 힘없이 흔들리는 푸른 깃털이 그 괴수가 챠미네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챠미네는 그 모든 것들을 이용하여 외부의 존재들을 짓밟고 있었다. 케이는 상상치도 못한 무시무시한 광경에 얼어붙었다.
"나가! 여기서 나가!!"
온 숲이 그의 강력한 증오를 담아 일제히 외쳤다. 외부의 존재들은 뭐라 떠들어 대며 막대기나 빛줄기 따위를 집어던졌다. 케이는 가까이 다가가지도, 달아나지도 못한 채 온 몸을 떨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막대기가 몸에 꽂힐 때마다 챠미네는 힘을 잃는 듯 보였고, 빛줄기에 맞을 때마다 덩굴과 뿌리들이 부서져 내렸다. 챠미네의 증오만큼이나 외부의 존재들도 분노하고 있었다. 케이는 혼란 속에서도 챠미네를 구출할 틈을 찾으려 애썼다.
"...este! maosteike! este persima!!"
케이는 갑자기 제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곧 외부의 존재들이 자신을 발견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들이 자신을 호의적으로 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케이는, 그 외침을 신호로 챠미네에게 달려들었다.
"정신 차려!!"
케이는 팔을 펼치며 도약했고, 그대로 챠미네의 상체를 덮치듯 끌어안았다. 겨우 10살 난 테라핀이지만 발굽동물 특유의 속도와 도약력은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되기에, 그 충격에 챠미네의 나무뿌리 몇 줄기가 뜯어져 나갔다. 둘은 함께 넘어져 바닥에 호되게 부딪혔다.
가까이서 본 챠미네의 상태는 더 심각했다. 한때 몸의 일부를 이루고 있던 코트와 장식들은 검게 그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얼굴과 몸에는 화상과 자상이 가득했고, 한 쪽 눈은 날카로운 것에 베여 이미 시력을 잃은 듯 보였다. 그래서 케이는 어쩔 수 없이 챠미네의 반대편 눈을 바라보았다. 한때 싱그러운 푸른색이었던 그 눈은 이제 초점을 잃은 채 맹목적이고 서글픈 광기로 빛나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이러지 말자. 우리 여기서 나가야 해. 빨리.."
다음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케이의 등에 날아들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랐던 외부의 존재들이 공격을 재개하고 있었다. 케이는 짧은 순간 생각없이 이 아수라장에 뛰어든 자신을 자책했지만 이미 일어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케이는 다만 온몸으로 자신의 유일한 가족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머리에 닿는 손길에 케이는 눈을 떴다. 바로 앞에 챠미네의 상처투성이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케이의 정신을 사로잡은 것은 챠미네의 의지에 찬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고, 그래서 케이는 부정의 비명을 질렀다.
"Te parda? kasavelito feris tsnata petona?"
(말이 돼요? 숲 한가운데에서 해일이 일어났다고요?)
"Nate muli. peshekara echrai wovel quinetiro wotra bethena. liverai nome fichica."
(그러니까 말이야. 하여튼 그쪽에 있던 마을들은 통째로 물에 잠겼다나. 생존자는 찾지도 못했대.)
"Erika teme jadi.."
(세상 별 일이 다 있네...)
여행자들이 지나가며 두런거리는 소리에 아이는 눈을 떴다. 시야가 검은색으로 가득 차 있다면 눈을 뜬 것과 감은 것의 차이를 느끼기 어렵긴 하지만. 그래서 케이는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감각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자신이 어떤 푹신한 것에 누워 있다는 사실과, 더 이상 두통이나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괜찮은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케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 앞의 검은색 존재가 생각보다 꽤 크다는 사실에 놀랐다. 시선을 더 높이 올리자, 그제서야 케이는 자신을 품에 안고 있는 검은 존재의 머리를 볼 수 있었다.
검은색의 반투명한 막 속에는 더 검은 덩어리들이 들어있었다. 무정형의 몸통 위로는 길게 목이 뻗어 있었고, 머리에 달린 귀처럼 보이는 기관 뒤쪽으로 세 쌍의 부속지가 돋아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제 등에 꽂혀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케이는 기겁하여 후다닥 일어났다. 급히 등에 손을 뻗어 건드려 보았지만 불타는 듯한 고통 때문에 황급히 몸을 다시 움츠렸다.
그제서야 케이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 존재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슬라임과 유사한 형태라는 것을 케이는 몰랐지만,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을 가질 수는 있었다. 케이는 고맙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 슬라임은 별다른 반응 없이 케이를 바라보았다. 슬라임에게는 이목구비가 없었기에 그것이 정말 자신을 보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그의 무표정한(물론 이것도 케이의 자의적 해석이지만)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케이는..
?
케이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등이 아팠고, 검은 존재가 그걸 치료해 줬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 푹신함이 케이는 마음에 들었다.
케이가 일어난 것을 확인하자, 슬라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정형의 몸통이 마구 요동치며 그 거대한 몸을 허공으로 띄워올렸고, 까만 덩어리 하나가 꼬리처럼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아이가 보호자의 손을 잡듯, 케이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길게 늘어진 슬라임의 부속지를 붙잡았다. 그것 역시 말랑말랑한 것이 케이의 마음에 들었다.
케이는 문득 이 검은 존재에게 이름을 주고 싶어졌다. 무의미한 주변 세상으로부터 이 존재를 분리해내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럴 가치가 있었다. 케이는 그 존재가 마음에 들었다.
'디라고 불러야지. 디..'
디는 천천히 움직였다. 케이는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어디론가 가고 싶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래서 디를 따라가면 언젠가 도착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그 막연함과 모호함이 케이는 마음에 들었다.
케이는 반대쪽 손으로 디의 찰랑거리는 몸통을 잡았다. 그러자 마치 젤리같은 촉감의 방울 하나가 디에게서 떨어져 나와 케이의 손에 쥐어졌다. 케이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걸 입에 넣어 삼켰다. 그러자 세상이 조금 더 단순해졌다. 케이는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디는 앞으로 나아갔고, 케이도 그렇게 했다.
디는 때때로 멈추어 바닥에 앉았고, 케이도 그렇게 했다.
디는 가끔씩 노래같은 이상한 푸르르 소리를 냈고, 그럴 때면 케이도 오카리나를 꺼내어 불었다.
배가 고플 때면 케이는 디의 몸통을 조금씩 먹었다. 디는 아주아주 거대해서 한 방울 정도 먹어도 티도 나지 않았다. 디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둘은 숲을 걸었다. 바닷가를 걸을 때도 있었다. 강을 따라 산을 오르기도, 내려가기도 했다.
가끔은 누군가 케이를 붙잡고 많은 말들을 쏟아내기도 했다. 케이는 그 말을 이해했지만,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케이에게는 디가 있었으니까.
케이는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가끔씩 케이는 꿈에서 푸른 깃털을 떠올렸다. 그리고 디의 머리에 푸른 깃털이 붙어 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디도 케이는 충분히 마음에 들었다.
그보다 더 가끔씩 케이는 나무를 떠올렸다. 그리움 같은 감정이 들긴 했지만, 그리움이 주는 찌르는 듯한 느낌이 케이는 마음에 들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케이의 꼬리가 길고 검은 슬라임처럼 변해가고 있었고, 케이의 손끝이 검게 물들어 가고 있었지만, 케이는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딱 하나, 불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디도 그걸 알고 있는지 노을이 지기 전에 케이를 재웠고, 해가 완전히 뜨면 케이를 깨웠다.(어쩌면 그저 케이가 그 시간에 맞춰 자고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케이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일어났다.
몸을 폈다.
세상을 바라보았다.
물이 많이 있었다. 그건 살아있는 물이었다.
나의 물이었다.
나의 아이였다.
내가 물살에 떠내려 오고 있었다.
붙잡았다.
움직여 갔다.
나에게 상처가 있었다.
메우고 싶었다.
나는 나로 나의 상처를 메웠다.
눈을 떴다.
일어났다.
몸을 폈다.
세상을 바라보았다.
테라핀이 공명하는 자연의 정수는 어떤 개체가 아니라, 영험한 힘이 서린 지형지물 그 자체이다. 그래서 테라핀은 하루의 대부분을 정수를 '가꾸는'데 사용한다.
테라핀은 '삶'이라는 표현 대신 '공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의미적으로는 공생과 비슷하지만 음악적인 느낌을 주기 위한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보통 한 정수에는 2~3명 정도의 테라핀이 공명한다.
테라핀은 자신이 공명하는 정수의 일부로 변신할 수 있다. 강에 공명하는 테라핀은 강물이 될 수도 있고, 숲에 공명하는 테라핀은 나무가 될 수도 있다. 이 변신을 테라핀들은 '동화'라고 부른다.
테라핀은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지성과 자아를 가지고 태어난다. 테라핀은 어렸을 적 모습 그대로 평생 성장한다. 테라핀은 이론적으로는 영원히 살 수 있지만 그러진 않는다. 평균적으로 200살 정도가 넘어가면 자신이 공명하는 정수에 동화되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테라핀들이 정수를 정성껏 가꾸는 이유에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꾼다는 이유도 있지만, 자기 가족들을 돌보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말랑한 이야기 덩어리들 > 테라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Terrapin 종족 설정 (0) | 2021.06.0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