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잠에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평소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 하루여서 그랬으리라.

나는 한없이 검은 공간에 있었다. 바닥에 발이 닿는 감각은 없었지만, 알 수 없는 안정감이 내 몸을 받치고 있는 듯 했다. 그 기이한 느낌 때문에 반쯤은 걷고 반쯤은 헤엄치는 듯한 자세로 기다시피 움직여 갔다.

사방에 중력이 있었다. 그조차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똑바로 서 있는 것 같다가도 다음 순간 뒤로 누워 있는 것 같았고, 몸 속으로 당겨지는 듯한 긴장감과 바깥으로 터져나갈 듯한 압박감은 동시에 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몸은 그런 기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지만, 이성은 내가 평범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성의 말은 어느 정도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공간의 특수성에 조금씩 적응할 여유도 되찾을 수 있었다.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알 수 없는 기대감이 그곳에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 공간으로부터 무언가의 정신이 새어나오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그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몇 번이나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그것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매질에도 방해받지 않고 다른 무언가와 소통하고 있었다.

사실 소통인지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그것의 의미 전달 방식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그 정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떠올렸고, 그것을 무형의 형태로 내보내는 듯한 상상을 했다.

 

'이곳은 어디인가? 그쪽은 무엇인가?' 

 

그와 동시에 흥미로움, 새로움, 독특함, 신기함, 가벼움, 흐름, 충만함, 혼란스러움, 기대감, 이외의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개념들이 하나가 되어 내 정신으로 쇄도했다. 그것은 유쾌한 '대답'이었다.

내 생각을 읽은 듯 즉시 되돌아오는 '대답'은 놀라웠다. 그래서 대답할 말을 생각해 내느라 시간을 소비하는 쪽은 오히려 질문하는 내 쪽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언어라는 껍데기를 씌우지 않은 순전한 개념과 의미, 느낌과 감정으로만 대화하고 있었다. 나 역시 정신을 열고 그것과 직접 맞닿아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그 동안 쌓아왔던 초현실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그 시도의 위험성에 대해 시끄럽게 외쳤다. 이대로 완전히 무방비 상태의 정신을 내보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그것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내 정신이 잠시라도 열려 있어야 했다. 내가 내 자신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그러니까 질문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의 정신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질문하려 정신을 여는 그 짧은 순간에 그것은 내 질문을 읽고, 대답했다. 그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없었다.

 

'어떻게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었나? 당신은 누구인가?'

 

이어 그것의 대답이 돌아왔다. 차원, 품고 있는, 고요함, 시끄러움, 움직임, 분리됨, 분리되지 않음. 그 모든 개념에는 한없는 기대감이 점철되어 있었다. 그 기대감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문득 나는, 내가 이곳을 처음 바라보았을 때 느껴졌던 기대감이 꼭 나만의 것은 아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 짧은 순간에 아마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무의식적으로 궁금해했을 것이고, 그 질문에 이 공간이 답했던 기대감을 내 감정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바라는지 물었고, 그것은 담백하고 단순한 대답을 보내왔다. 예술.

 

예상치 못한 명확한 의미 전달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짧은 순간 나는 내가 잘못 느낀 것이 아닐지 고민해 보았지만, 그것이 보내 오는 개념은 다른 것으로 해석될 수 없었다. 감동적인, 주체와 객체를 구분할 수 없는, 몰입, 집중, 매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엮는 감각. 

아마 그림이었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을 것 같다. 춤을 추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개념을 전달받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나의 악기였다. 신비로운 보랏빛 음색으로 관객은 물론 내 자신까지 압도하는, 나의 일부이자 친구인 빛의 악기. 

나는 그 공간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나였고, 내 생각은 그것이 보내 오는 기대감에 푹 잠겨 있었다. 그것은 곧 시작될 연주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기대감이었고,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한 지휘봉 끝을 바라보는 연주자의 기대감이었다. 

언제부턴가 익숙한 장엄함이 내 곁에 있었다. 나는 건반을 손끝으로 살짝 쓸었다. 수많은 관객들을 보아 왔지만, 하나의 공간을 위해 연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는데. 아,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꿈이었으니까 말이 되었으려나? 어쨌거나.

나는 긴장 속에서 첫 건반을 눌렀다. 


분명 익숙한 음색이었지만 동시에 생경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소리는 공기 중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내 정신으로 직접 파고들고 있었다.

연주의 시작은 머리가 명령하지만, 다음 순간을 이끄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다. 정신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음 때문에 머리는 혼란스러웠지만, 손은 이미 다음 건반을 찾아 알아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자신을 객관화하듯 나는 이 연주가 제대로 이어질 것을 완벽히 확신했고, 그래서 여유롭게 건반에서 시선을 돌려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내가 받은 인상은, 공간 전체가 뒤틀리고 흔들리며 춤추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걸 손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끝이 스칠 때마다 빛이 공간을 수놓았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박자에 맞추어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그것은 부딪히는 대신 어느 순간 흩어져 전체가 되어 있었다.

멀리서, 가까이에서, 불꽃 같은 것들이 피어올랐다. 불가능한 각도로 휘어지다, 꺾이다, 마침내 비틀어져 끊어졌다. 그런데 그것들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착시현상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왜 저 부서진 성운은 아직도 하나란 말인가?

면들이 광분하여 심연에서부터 뛰쳐올랐다. 그것은 입체가 되었다가, 표현 불가능한 형태로 되돌아가다가 다시 면이 되었다. 공간은 자신을 나누어 춤추고 있었지만 누가 보아도 그것은 하나의 춤이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가볍게 몸을 흔드는 용오름 같았다. 다만 그 바다가 위, 아래, 모든 곳으로 확장되어 있을 뿐이었다. 어디인지도 모를 중심에서, 그것은 모든 정신과 존재로 춤추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연주로써 그 춤을 감히 이끌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경이를 내 불완전한 감각으로밖에 담을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며, 문득 어떻게 이렇게 무덤덤하게 감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여지없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 느꼈던 기묘한 안정감을 떠올렸다. 마치 내 몸을 붙들어 주었듯 무언가가 내 정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 주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것은 시간을 답했다. 시간의 흐름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안정이었고, 동시에 변화하지 않는 정적이었다. 나는 무엇이 나를 이토록 침착할 수 있게 도와줬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것은 모든 정적인 개념들의 집합체였고 그 자체였다.

나는 춤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물었다. 그것은 공간을 답했다. 정적인 시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춤추며 모든 순간을 변화시키는 것. 멈추지 않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요구했고, 현재를 끊임없이 과거로 무너뜨려 보내며 미래를 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강대한 역동성을 정적이 관통하는 동시에 품고 있었다.

 

나는 정적이 저 광란의 춤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정적이 보내 온 답은 부정이었다. 비록 어떤 움직임도 보이고 있지 않지만, 그는 그렇게 가만히 있음으로써 춤추고 있었던 것이라고 답했다. 움직임으로써 춤출 수 있다면, 가만히 있음으로써 춤추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정적을 마주하기 위해 애썼다. 그것은 마지못해 보내듯 어떤 이미지를 내 정신으로 보내주었다. 거대한 나무, 빽빽하게 모든 공간에 퍼져 있는 나무가 있었다. 그것에는 명확한 중심이 있었다. 가지와 뿌리는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역동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정적의 나무가 뻗어 있으리라고 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주의를 돌려 역동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제 꽤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까, 공간 전체가 말이다. 그 전까지는 텅 비어있는, 아무것도 없는 말 그대로의 빈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사방이 꽉 차 있다는 느낌이었다. 비록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고 그 무엇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바로 그랬기에 그것은 역동과 변화로 충만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내 연주에 맞추어 춤추고 있었다.

 

나는 어떤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변화가 나에게 기대했던 것은 예술이라는 계기였던 것이다. 최초의 변화, 최초의 움직임. 그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하지만 왜 예술이었을까? 나는 그 의문을 떠올렸지만, 이번에는 역동과 정적은 답을 주지 않았다. 나는 그 느낌에 당황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어느새 연주가 끝나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잠시 건반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서야 완성된 하나의 우주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좁은 우주. 그곳에 있는 단 두 개의 행성. 나는 그 행성들을 바라보았다. 한 곳은 정적에 감싸여 가만히 부유하고 있었고, 한 곳은 역동적으로 날뛰며 격렬히 춤추고 있었다.

세상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접해 왔던 수많은 창조신화들이 떠오르며 약간은 어이없다는 느낌도 들었다. 역동과 정적은 유쾌하게 웃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역동의 손 끝에는 너울거리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일고 있었다. 손, 발, 이외의 무엇이든. 몸의 어떤 부분에도 명확한 끝이 없었다. 움직이기 편한 가벼운 차림에, 정돈이 불가능해 보이는 부속지들이 자유분방하게 흩날렸다. 그 눈빛은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정적은 눈을 감고 있었다. 팔과 다리는 각각 가지와 뿌리였고, 옷은 무겁고 불편해 보였지만 그 사실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날갯짓하듯 두 팔을 높이 펼친 채, 억만년이라도 버틸 것 같은 그런 안정감을 온 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약간 두려움을 느꼈다. 내 부족함 때문에, 나의 한계 때문에 저 신적인 존재들이 나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진 건가?

 

'그게 내가 바라던거야!' 

 

역동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정적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그것이 역동의 말에 긍정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춤출거야. 쟤도 춤출거고. 우리는 같이 춤출거야. 연주해줘서 고마워. 이젠 우리가 춤출 수 있어!'

내가 발판을 만들어 주었으니, 이제 더 높이 오르는 것은 그들의 몫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내 생각을 읽은 듯이 역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은 그저 제 흥에 못 이겨 그런 것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역동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것은 정확히 내 쪽으로 팔을 휘두르며 뛰쳐올랐고, 나는 기겁하여 뒤로 넘어졌다. 


거꾸로 떨어지는 듯 한 추락감은 정확히 침대 아래로 머리를 박고 굴러떨어지는 것으로 현실화되었다. 나는 거의 꺾일 뻔한 목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앉아 잠시 상념에 잠겼다.

예술은 전달자, 중재자, 중간의 다리와도 같은 존재다. 예술가의 의미는 예술을 통해 감상자에게 전달된다. 

아마도 나의 세상, 나의 기억이 내 연주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되었겠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그들의 몫이다. 그것이 예술의 수용이니까. 그렇게 친다면, 어쩌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감상자들일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예술에서 하나의 세상이 탄생한다. 감상자가 한 명 뿐이라면 편향된 세상만이 만들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둘이었다. 그것도 가장 반대 극단에 서 있는 둘. 나는 그 둘이 서로의 균형을 잡아 주며 만들어갈 세상을 잠시 상상해 보려 했다.

딱 제이드가 문 밖에서 나를 부르기 전까지.

 

"티카! 지금 해가 중천에 떴는데 언제까지 자려고 그래! 빨리 일어나!"

 

"아, 방금 일어났어요! 진짜라니까요? 그리고 여긴 산 위라서 해가 너무 빨리 뜨는 감이 있다고요!"

 

"그야 당연하지! 내가 이렇게 빛나니까! 해가 질 일이 없겠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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